고소득층은 자산 불어나고 저소득층은 지갑 닫히는 ‘두 갈래 경기’
성장·증시와 고용·소비가 따로 움직이는 미국 경제의 이중 구조
중산·저소득층은 물가 압박, 상위층은 자산 호황…심화되는 경제 양극화
기업 전략까지 뒤흔드는 ‘계층별 소비 격차’의 현실
기술 투자와 자산 상승이 만든 새로운 경제 지형…지속 가능성은?

미국 경제를 바라보는 기업 경영진부터 월가 전문가, 중앙은행 관계자들까지 최근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바로 ‘K자형 경기’다. 표면적으로는 성장과 부양이 동시에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계층 간의 흐름이 극명하게 갈라지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상층부는 자산 불어나는 반면
‘K’자의 윗부분은 소득과 자산이 꾸준히 늘어나는 고소득층을 뜻한다. 반면 아랫부분은 물가 부담과 둔화된 임금 상승에 짓눌린 중·저소득층을 가리킨다.
AP통신에 따르면 미국 경제는 겉으로는 견조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성장률은 양호하고 가계 소비도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고용은 둔화되고 실업률은 서서히 오르고 있다. 첨단 기술센터 건설은 활발한 반면 제조업 현장에서는 감원이 이어지고, 증시는 최고치 부근에서 움직이지만 임금 상승률은 힘이 빠진 모습이다. 이처럼 흐름이 제각각인 복합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K자형’이라는 표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중·저소득층의 생활비 부담은 정치권에서도 민감한 이슈다. 높은 월세, 식료품비, 수입품 가격 등이 유권자의 불만을 키우며 최근 여러 선거에서 정치적 판세에도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버지니아 윌리엄 앤드 메리대의 경제학자 피터 앳워터 교수는 “하위 계층은 물가 상승의 누적된 충격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며 “반면 상위 계층은 자산 가격 상승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경기 회복, 모든 계층이 함께 오른 것은 아니었다
앳워터 교수는 코로나 위기 당시 처음으로 ‘K자형 경기’라는 표현을 널리 알렸다. 당시에도 재택근무가 가능한 전문직과 주식 보유 계층은 비교적 ‘상승 곡선’을 타는 한편, 외식·여가·제조업 등 대량 해고가 발생한 업종의 노동자는 깊은 침체를 겪으며 ‘하락 곡선’으로 향했다. 코로나 이후 한동안은 양상이 달라지기도 했다. 경제가 다시 열리면서 식당·호텔·여가 업종의 급격한 인력 부족이 발생했고, 이 시기에는 오히려 저소득층의 임금이 고소득층보다 더 빨리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 들어 고용이 둔화하면서 저소득층의 임금 상승률이 크게 떨어졌고, 물가 상승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니애폴리스 연방준비은행 분석에 따르면 하위 계층의 실질 임금 상승률은 최근 연간 1%대 초반으로 급락해 상위 계층보다 낮은 수준이다. 소득 증가세가 약해진 만큼 지출도 줄었다. 미국의 한 대형 은행 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10월 고소득층 소비는 1년 전보다 2%대 중반 증가한 반면, 저소득층은 1%에도 미치지 못했다. 보스턴 연방준비은행 조사에서도 최근 소비 증가분의 상당 부분은 고소득층이 이끌고 있으며, 중·저소득층은 지출을 줄이면서 신용카드 부채만 늘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 소비 양극화에 맞춰 전략 갈라
미국의 대기업들도 이 같은 흐름을 체감하고 있다. 일부 기업은 고가 제품을 강화해 부유층 수요를 노리면서, 동시에 저소득층을 겨냥해 용량을 줄인 제품이나 보다 저렴한 구성을 내놓는 등 양쪽을 동시에 공략하고 있다. 한 음료 대기업의 최고운영책임자는 “소득 수준에 따른 소비의 격차가 여전히 크다”며 “여유가 있는 계층은 더 높은 가격의 제품을 구매하는 반면, 중·저소득층은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작은 제품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항공업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장거리 노선의 일등석과 비즈니스석 판매는 호황을 누리는 반면, 일반 좌석 이용객은 지출 부담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대형 전자제품 유통기업의 경영진은 “전체 소비의 대부분을 상위층이 이끌고 있다”며 “나머지 계층은 일자리가 얼마나 안정적일지에 따라 지출 여부를 결정한다”고 말했다.
기술 투자와 자산 상승이 격차를 더욱 확대
대규모 기술 투자와 자산 시장 호조 역시 양극화를 키우는 요인으로 지적된다. 미국의 대표 기술기업들이 인공지능 기술 경쟁을 앞세워 주가가 가파르게 오르자, 주식 보유 비중이 높은 상위층은 큰 자산 이익을 얻고 있다. 그러나 전체 주식의 절반 이상을 상위 소수 계층이 보유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상승 혜택은 경제 전반에 고르게 파급되지 못하고 있다. 앳워터 교수는 “상위 계층의 경제는 마치 독립된 세계처럼 움직인다”며 “인공지능과 주식시장, 자산 가치라는 순환 안에서 돌아갈 뿐, 하위 계층과는 연결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전문가들은 이러한 양극화가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의 지속가능성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중·저소득층의 소비가 크게 위축된다면 주요 기업들의 매출과 광고 시장이 급격히 줄며 전체 경제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악의 경우 첨단 기업들의 투자 축소와 경기 후퇴 가능성까지 거론한다.
다만 다른 시각도 있다. 내년 초 다수 가계가 세금 환급을 받게 되면 소비 여력이 일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또한 내년 중 새로운 중앙은행 의장이 임명되면 금리 인하가 예상보다 빨라질 가능성도 있어, 이는 경기와 임금 회복을 다시 자극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