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방위 공약 흔들리자 발트해 연안국가들 자구책 강화
노르트스트림 폭발 이후 해저 케이블 보호 체계 본격화
그림자 선단 대응 위해 정보 공유·공동 순찰 확대
국제 해양법 범위 안에서 실행되는 지역 안보 협력 모델
북대서양조약기구 미래, 소규모 지역 동맹에 달렸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20일 엘리자베스 브로 칼럼을 통해 미국이 유럽 방위에 대한 책임을 축소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가운데, 발트해 연안국가들이 해저 케이블과 파이프라인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 차원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발트해 지역 국가들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해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지만, 최근에는 가장 강력한 동맹국인 미국이 방위 공약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새로운 불안 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 방위에 소극적인 입장을 시사하면서 동맹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는 발트해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2022년 9월 스웨덴과 덴마크의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2개가 폭발한 사건은 지역 국가들에 큰 충격을 줬다. 이전부터 해저 케이블과 파이프라인이 파괴 공작에 취약하다는 경고가 있었지만, 실제 위협 사례가 거의 없었던 탓에 경계가 느슨해졌다는 평가다.
이후 러시아의 이른바 그림자 선단이 등장해 제재를 회피하며 운항했고, 2023년에는 해저 케이블 2개와 파이프라인 1개가 손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에너지와 인터넷 공급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다.
발트해에서 러시아의 해저 인프라 위협과 그림자 선단 활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북대서양조약기구는 2026년 2월 북극과 고위도 지역에서 다영역 군사 활동인 ‘아틱 센트리’를 출범시켰다. 나토는 러시아가 북극사령부를 신설하고 구 소련 시절 군사기지와 비행장, 심해 항만을 재가동했으며 새로운 무기 체계를 시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2025년 10월 노르웨이 보되에 북극권 통합항공작전센터를 개설했고, 2025년 12월에는 덴마크·핀란드·스웨덴을 미국 노퍽 합동군사령부 관할 구역에 추가 편입했다. 핀란드에는 전진 지상군 체계가 구축되고 있으며, 노르웨이의 대규모 혹한기 연합훈련도 ‘아틱 센트리’ 체계에 포함됐다.
이에 발트해 연안국가들은 러시아를 제외한 채 협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정보 공유를 확대하고, 해저 인프라 상공의 이상 징후를 탐지하는 인공지능 기반 감시 체계를 도입했다. 해군과 해안경비대의 순찰 활동도 확대됐다. 국제 해양법상 선박의 항행의 자유가 보장돼 있어 단속이 쉽지 않지만, 그림자 선박에 대한 점검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지난해 초에는 해저 케이블과 파이프라인을 24시간 보호하기 위한 공동 해상 순찰 체계도 출범했다. 이 순찰 활동은 공식적으로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이니셔티브이지만, 실제 운용은 발트해 연안국가들이 주도하고 있다.
핀란드는 올해 1월 다른 발트해 국가들과 함께 해양 감시 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핀란드 정부는 자국 영해와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발생하는 상황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역량과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에스토니아의 국가안보 보좌관 에르키 토리는 2023년을 “경종을 울린 해”로 평가하며, 2026년 현재 러시아의 그림자 선단 대응이 발트해를 넘어 다른 해역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기존 국제 해양법이 제약 요소이기는 하지만, 법의 범위 안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 있으며, 각국 간 경험과 대응 방안을 공유하는 것이 해결책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해저 케이블과 파이프라인 보호 역시 법치주의 원칙 안에서 대응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움직임은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 해군은 지난 1월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 해역에서 위장 국적을 사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러시아 그림자 유조선을 나포했다. 이는 최근 수개월 사이 두 번째 조치다.
가디언은 발트해 연안국가들의 협력이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들이 향후 취할 수 있는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미국이 동맹 방위에 대한 의지를 축소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인접 국가 간 소규모 협력 체계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덴마크 총리 메테 프레데릭센은 그린란드 위기 당시, 미국이 동맹국 영토를 공격할 경우 북대서양조약기구는 존속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유럽 동맹국들이 충분한 방위비를 지출하지 않으면 방어하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이후 회원국들은 국방 및 관련 분야 지출을 국내총생산의 5%까지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여론 역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스웨덴에서는 자국이 공격받을 경우 미국이 지원할 것이라고 믿는 국민이 2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6월 영국에서는 러시아가 발트해 국가들을 공격할 경우 미국이 지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응답이 51%에 달했다.
가디언은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발트해 연안국가들의 지역 협력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미래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의 역할 축소 여부와 관계없이, 인접 국가들이 자율적으로 지역 안보를 책임지는 구조가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