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된 가장의 선택, 생존의 끝에서 마주한 범죄
박찬욱, 자본주의의 냉혹한 얼굴을 스릴러로 비춘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 그 선택의 대가
경쟁과 불안의 시대, 범죄는 개인의 문제인가
낙엽처럼 사라지는 일자리, 흔들리는 인간의 존엄

최근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낙엽처럼 삶과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 냉혹한 풍자 스릴러다. 미국 AP통신은 이 작품을 두고 “차갑고도 악마적인 상상력이 절정에 이른 영화”라며 박찬욱 감독이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연출가임을 증명했다고 평가했다.
영화는 주인공 유만수의 일상적인 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가족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며 “어서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의 소망은 곧 아이러니로 바뀐다. 가을은 시작되지만, 그가 맞이하는 것은 계절이 아닌 삶 전반의 붕괴다. 25년을 몸담았던 제지 공장에서 예고 없이 해고된 그는 안정된 가정과 경제적 기반을 한순간에 잃는다. 숲속에 자리한 현대식 주택, 애지중지하던 온실과 분재, 심지어 일상의 사소한 즐거움까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AP통신은 이 영화가 단순한 중년 남성의 재기 서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만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스스로 가짜 채용 공고를 내고,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비교 분석한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경쟁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극단적인 선택을 결심한다.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겠다는 발상이다.
이 설정은 범죄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야기지만, 박찬욱 감독의 손을 거치며 전혀 다른 차원의 영화로 완성됐다. AP통신은 박찬욱 감독이 폭력과 긴장을 절제된 화면 구성과 블랙 유머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잔혹한 사건조차도 세련된 형식 안에서 진행되며, 관객은 웃음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특히 유만수가 표적으로 삼는 인물들 역시 각자의 가정과 실직의 고통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개인의 범죄를 넘어 구조적 문제로 시선을 확장한다. AP통신은 이 영화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경쟁과 불안에 잠식되는지를 날카롭게 포착했다고 분석했다. 숲, 나무, 유리창에 비친 반사 이미지 등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각적 장치는 인물들의 고립과 불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 같은 사회 비판적 시선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AP통신은 두 작품이 나란히 상영된다면 현대 사회의 불안과 계급 구조를 더욱 강렬하게 체감하게 될 것이라고 평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결코 허구에 머물지 않는다. 한국 사회 역시 구조조정과 고용 불안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인력 감축 논의,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과 중장년층의 재취업 난항은 유만수의 절박한 선택을 낯설지 않게 만든다.
배우 이병헌의 연기에 대해서도 높은 평가가 이어졌다. 유만수는 본질적으로 살인자가 아닌 인물이며, 그가 범죄를 실행하려 애쓰는 과정 자체가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그의 자기 합리화는 많은 관객에게 불편할 정도로 현실적인 공감을 유도한다. AP통신은 이 인물이 보여주는 선택이 현대 사회에서 반복되는 근본적 착각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박찬욱 감독은 해고와 제거라는 개념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자동화와 인공지능, 그리고 시스템 전반의 문제로 확장한다. AP통신은 이 결말이 단순한 반전을 넘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시대의 변화를 냉정하게 선언한다고 평가했다. 영화 속에서 떨어지는 낙엽은 다시 봄에 돋아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는 폭력성과 언어, 일부 성적 표현으로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았으며 러닝타임은 139분이다. 9월 개봉 이후 현재까지 국내에서 약 294만 명의 누적 관객을 기록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정교한 연출과 사회를 향한 냉철한 시선이 결합된 이 작품은 한국 영화가 세계 영화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