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퇴직연금 시장, 대체자산 확대 논란
401계좌에 고위험 투자 허용…개인 책임 커지나
월가의 새로운 성장처, 은퇴자산을 둘러싼 우려
규제 완화 속 개인투자자 보호 공백 지적
미국 정책 변화, 글로벌 투자자에 미칠 파장은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일반 개인투자자의 대체투자 접근을 확대하겠다고 나선 가운데, 이에 따른 투자 위험 증가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가디언은 월가와 연방 규제당국, 투자자 보호 전문가들의 발언을 인용해 고위험 금융상품이 이른바 ‘엄마 아빠 투자자’로 불리는 소액 개인투자자들에게까지 확산될 경우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플로리다주 잭슨빌에 거주하는 캐시 슈버트는 2018년 투자자문가를 통해 은퇴자금 25만 달러 이상을 운용했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재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설명을 듣고 401계좌 자금을 구조화 채권과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 등 고위험 상품에 투자했다. 401계좌는 미국 직장인이 급여의 일부를 세전으로 적립해 운용하는 대표적인 퇴직연금 제도로, 투자 성과에 따른 손익을 개인이 직접 부담하는 구조다. 그러나 2024년까지 상당수 상품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자산의 절반 이상을 잃은 것으로 전해졌다.
가디언은 이러한 사례가 개별 사건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전체 퇴직연금 자산 규모는 약 48조 달러에 달하며, 이 가운데 401계좌와 기타 고용주 기반 퇴직연금은 2025년 9월 말 기준 13조9000억 달러 수준이다. 월가 금융사들은 이 방대한 자금을 새로운 성장 시장으로 보고 있으며, 전통적인 주식과 채권 외에 사모펀드, 사모채권, 구조화 상품, 암호화폐 등 대체투자 상품 판매를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8월 ‘401계좌 투자자를 위한 대체자산 접근의 민주화’라는 제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해당 명령은 대체자산이 제공하는 성장성과 분산 효과를 강조하며, 퇴직계좌를 통해 보다 다양한 투자 선택지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백악관은 성명을 통해 투자 결정에 따른 위험 인식은 투자자 본인의 책임이라는 점을 전제로, 선택권 확대가 정책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투자자 보호 단체와 전직 규제당국자들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과거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고문을 지낸 바버라 로퍼는 퇴직연금 자금이 금융업계의 주요 수익원으로 부상했다며, 고위험 대체상품은 높은 수수료와 복잡한 구조로 인해 투자 경험이 부족한 개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금융산업규제기구(FINRA)가 2025년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투자자 2,861명을 대상으로 한 금융지식 평가에서 평균 점수는 11문항 중 5.3점에 그쳤다. 조사에서는 “향후 5년간 매년 25% 무위험 수익을 보장한다”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투자 제안에도 절반 이상이 투자 의향을 보였다. 이는 투자자 상당수가 금융 이해도가 부족해 허위·과장 정보를 쉽게 믿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디언은 이를 근거로, 고위험 금융상품이 확대될 경우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개인 투자자가 큰 손실을 볼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증권거래위원회 역시 2022년 사모펀드를 운용하는 등록 투자자문사를 점검한 뒤, 과장된 수익률 홍보와 부실한 실사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고 밝힌 바 있다.
가디언은 또 다른 사례로 매사추세츠주 투자자 캐슬린 매컬리가 2022년 사모펀드에 45만 달러를 투자한 뒤 손실을 입었다고 전했다. 해당 상품은 공인투자자만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나, 매컬리의 자산 규모가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 소송 과정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현재 해당 사안은 연방 법원에서 다툼이 진행 중이며, 피고 측은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대체투자 상품의 수익 구조와 관련해서도 우려가 제기된다. 경제학자 크레이그 맥캔의 연구에 따르면 비상장 부동산투자신탁의 평균 연간 수익률은 6.3%로, 상장 부동산투자신탁 지수를 추종하는 펀드의 11.6%에 비해 낮았다. 연구진은 성과 차이의 상당 부분이 초기 수수료와 판매 비용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한편 미 하원은 2025년 12월 대체투자 관련 규제를 완화하는 투자법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은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감사 재무제표 없이도 주식 발행을 허용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현재 공화당 위원 3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투자자 보호를 강조해 온 유일한 위원의 재지명 절차는 중단된 상태다. 이에 따라 SEC 내에서 투자자 보호보다 규제 완화 쪽으로 정책 기조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전 위원 캐롤라인 크렌쇼는 퇴임 연설에서 최근 규제 완화 흐름이 1929년 대공황 이전과 유사하다고 경고하며, 사모시장은 본래 고위험과 정보 비대칭을 전제로 설계된 영역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반 개인투자자에게 무분별하게 개방될 경우 장기적으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디언은 전문가 전망을 인용해 소매 투자자의 사모시장 투자 규모가 현재 800억 달러 수준에서 2030년 2조4000억 달러까지 증가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다만 고위험 상품 비중이 확대될수록 손실 부담이 일반 가계로 이전될 가능성도 함께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미국 내 논란은 한국 투자자와도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예탁결제원 집계에 따르면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관액은 250조 원 안팎에 이른다. 상당수 개인 투자자는 글로벌 자산운용사가 운용하는 상장지수펀드와 연금 상품을 통해 미국 자본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미국 퇴직연금 시장에서 대체자산 편입이 확대될 경우, 글로벌 운용 전략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 경우 미국 자산 비중이 높은 한국 투자자 역시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