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원가 낮추던 한국 전자업계 '역풍'…AI發 PCB 원자재 폭등에 공급망 흔들

이성철 기자
Icon
입력 : 2026-08-21 8:01
Icon
글로벌마켓
2026-08-21 21:47

CCL 87%·PP 197% 급등, AI 서버가 고부가 소재 생산능력 빨아들여
범용 PCB까지 가격·납기 압박 확산
상류 소재·PCB업체 이익 늘지만 ODM 마진은 하락
2027년 소재 대체·PCB 축소 등 공급망 재편 분기점

PCB 제조 현장의 인쇄회로기판 / 사진: Balurbala/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중국 현지 생산·조달망을 활용해 제조원가를 낮춰온 한국 전자업계가 인쇄회로기판(PCB) 원자재 가격 급등이라는 역풍을 맞고 있다. 인공지능(AI) 서버와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로 전자급 유리섬유를 비롯한 동박적층판(CCL), 프리프레그(PP), 동박 수급이 빠듯해지면서 중국 소재·PCB 업체에서 시작된 가격 상승이 현지 PCB와 ODM 등 생산·조달망을 거쳐 국내 부품업체와 완제품 업체의 원가 부담으로 확산하고 있다.

21일 중국 PCB 생산현장에서 확보한 실제 구매자료에 따르면 FR-4 CCL 가격은 제품별로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다. 41×49 규격의 한 FR-4 CCL 원판은 2025년 6월 말 장당 99위안에서 올해 8월 185위안으로 86.9% 올랐으며, 별도 품목인 난야(Nanya) 계열 41×49 규격 FR-4 CCL도 올해 1월 131위안에서 8월 208위안으로 58.8% 상승했다. 두 제품은 원판 크기는 같지만 제조사와 세부 사양이 다른 별도 품목으로, 8월 가격 자체를 직접 비교하기보다 각 제품의 구매가격 상승 추이를 보여주는 수치다. 적층공정에 사용하는 1080 PP 역시 올해 1월 13.8위안에서 8월 41위안으로 약 197% 뛰었고, 18㎛ 동박은 같은 기간 1만8000위안에서 2만3500위안으로 약 31% 상승했다. CCL뿐 아니라 PP와 동박까지 PCB 핵심 원재료 가격이 동반 상승하면서 현지 생산법인의 원가 부담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PCB 제조·공급망 전문업체 AIVON도 지난 7월 말 전자급 유리섬유 가격이 8월 약 15% 추가 상승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대표적인 7628 유리섬유 가격은 지난해 3분기 저점 대비 약 두 배 수준까지 상승했고 7월 초·중순 평균 시장가격은 미터당 7.4~8.7위안까지 올라왔다. HDI와 고다층 PCB에 사용하는 2116·1080 등 박형 제품과 AI 서버용 저유전 유리섬유의 수급은 더욱 빠듯한 것으로 전해졌다.

범용 가전 등에 사용하는 CEM-3는 원재료 가격 상승에 특히 취약하다. 일부 중국 생산현장의 CEM-3 적용 모델을 분석한 결과 전체 제조원가에서 원재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약 70~82%에 달했다. 원재료 비중이 80%를 넘으면 생산성 향상이나 일반관리비 절감만으로 가격 상승을 흡수하기 사실상 어렵다.

납기도 길어지고 있다. 현장에서 파악된 CEM-3 2oz 소재의 원재료 납기는 약 16주, 1oz는 8~10주 수준이다. FR-4 역시 필요한 시점에 물량을 확보하기 어려워 일부 거래에서는 추가 비용을 지급해야 납기를 앞당길 수 있는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이번 공급난의 핵심에는 AI 서버용 고사양 PCB 수요 확대가 있다. AI 서버 PCB는 통상 20~40층 이상으로 구성되며 일부 고사양 설계에서는 최대 78층까지 적용돼 기존 서버보다 유리섬유 사용량이 3~8배까지 증가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여기에 고속 신호전송을 위한 저유전·초박형 소재 수요까지 빠르게 늘면서 CCL과 유리섬유 소비가 급증하고 있으며, 소재업체들도 제한된 생산능력을 수익성이 높은 AI용 고부가 제품에 우선 배정하면서 범용 PCB 소재의 공급 부족까지 심화시키고 있다.

현장에서는 고사양 M8·M9·M10 계열 CCL의 수익성이 범용 FR-4나 CEM-3보다 높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T-Glass 등 고사양 유리섬유 공급이 빠듯해지면서 일부 수요가 범용 E-Glass로 이동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E-Glass는 FR-4와 CEM-3의 핵심 원재료인 만큼 AI 서버 시장의 수요 증가가 범용 가전과 디스플레이용 PCB 가격까지 밀어 올리는 구조다.

공급을 단기간에 늘리기도 어렵다. AIVON에 따르면 고급 전자유리섬유 생산에 필요한 주요 직조설비는 신규 발주부터 공급까지 약 18~24개월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재고도 낮은 수준이어서 일부 소재는 수개월치 주문이 이미 확보된 상태다.

이 같은 공급 부족은 PCB 공급망 내부의 수익성에도 차이를 만들고 있다. 가격 상승분을 다음 단계로 전가할 수 있는 일부 원재료·CCL·PCB 업체에서는 실적 개선이 나타나는 반면, 이를 완제품 업체에 충분히 전가하기 어려운 ODM 등 하류 업체에서는 마진 압박이 커지는 모습이다.

현장에서 집계한 자료를 보면 EMC 관련 업체의 수익성은 29.4%에서 33.9%로 상승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중국 PCB 업체 선난서킷(深南电路)을 비롯해 여러 소재·PCB 업체도 최근 높은 수익성을 보이고 있다.

자료: (주식거래 이상 변동 공고) 생익과기 8월 7일 상하이증권거래소 공시·N페이증권·인베스팅닷컴


중국 소재업체의 이익 증가폭은 더욱 두드러진다. 생익과기(生益科技)는 올해 상반기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30.42% 증가했고 2분기 증가율은 146.72%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원재료 가격 강세와 AI PCB 시장 확대에 대한 기대는 실적을 넘어 주가에도 빠르게 반영되고 있다. 생익과기 주가는 2025년 초 이후 한때 약 5.96배 수준까지 상승했으며, 지난 8월 4~6일에는 3거래일 연속 종가 변동폭이 누적 20%를 넘어서면서 회사가 ‘주식거래 이상변동 공고’를 내기도 했다. 회사 측은 공고에서 당시 경영상 중대한 변화나 별도로 공시해야 할 중요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현장에서는 선난서킷(深南电路)을 비롯해 루이화타이(瑞华泰), 이호신재(逸豪新材), 커샹(科翔股份), 원저우훙펑(温州宏丰), 중이커지(中一科技) 등 PCB 및 관련 소재업체의 실적과 기업가치 상승 역시 원재료 가격 강세와 AI PCB 성장 기대가 선반영되는 흐름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일부 소재업체의 주가 상승 속도가 실제 이익 증가세를 크게 앞서는 모습까지 나타나면서, 공급 부족에 따른 가격 상승 기대가 자본시장에서 과도하게 선반영되고 있는지를 경계해야 한다는 시각도 나온다.

반면 PCB와 부품을 대량 구매하는 글로벌 ODM 단계에서는 수익성 압박이 나타나고 있다. Dell·HP·Lenovo 등 글로벌 PC 브랜드에 제품을 공급하는 대만 Compal의 매출총이익률은 2025년 2분기 5.9%에서 2026년 1분기 5.3%, 2분기 4.6%로 낮아졌다. 상류 소재·CCL·PCB 업체와 하류 ODM의 수익성이 엇갈리는 흐름은 향후 OEM을 포함한 공급망 전체의 가격 협상에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공급 부족을 배경으로 원재료와 CCL 가격 상승분이 PCB와 ODM 단계로 순차적으로 전가돼 왔지만, Compal과 같은 대형 ODM의 마진이 계속 낮아질 경우 추가적인 부품 가격 인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질 수 있다. 여기에 완제품을 판매하는 OEM·브랜드 업체까지 원가 부담이 커지면 상류 소재와 PCB 업체의 추가 가격 인상에 대한 저항도 본격화할 가능성이 있다.

업계에서는 그 전환점이 올해 4분기에서 2027년 1분기 사이 나타날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특히 Compal과 같은 대형 제조업체의 매출총이익률이 향후 3% 안팎 또는 그 이하로 내려가면 PCB와 부품 가격의 추가 인상에 대한 구매업체의 저항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게 현장의 관측이다. 이는 확정된 전망이 아니라 현재 수익성 추이를 바탕으로 한 시나리오다.

한국 업체에는 더욱 민감한 문제다. 국내 상당수 전자부품 업체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생산법인이나 협력사를 두고 있어 현지 CCL과 PP 가격 상승을 직접 부담하지만 국내 고객에게 이를 즉시 전가하기는 어렵다. 해외 생산법인의 원가는 오르는데 기존 납품가격은 유지해야 하는 이중 압박이 발생하는 셈이다.

추가 인상 가능성도 남아 있다. 중국 현장 취재 과정에서 일부 원재료 업체들은 생산현장을 방문해 9월부터 12월까지 매월 15~20% 수준의 가격 인상 가능성을 전달한 것으로 파악됐다. 아직 실제 구매가격에 반영된 확정 수치는 아니지만 이러한 가격 방침이 현실화하면 하류 업체의 원가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면적밀도가 다른 유리섬유 원단. 왼쪽은 220g/㎡, 오른쪽은 550g/㎡로 오른쪽 원단이 더 굵고 높은 강성을 갖는다. PCB용 CCL에도 전자급 유리섬유 원단이 핵심 보강재로 사용된다 / 사진: Cjp24/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문제는 가격이 계속 오를 경우 구매업체가 단순히 인상분을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CEM-3는 낮은 가격을 기반으로 범용 가전 등에 사용돼 왔지만 원재료 가격이 급등하고 납기가 8~16주까지 늘면서 기존의 경제성이 약화되고 있다.

실제 일부 한국 기업이 활용하는 중국 현지 생산·조달망에서는 제품 특성에 따라 CEM-3 대신 Metal PCB나 CEM-1 등 대체 소재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회로와 제품 사양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PCB 층수를 줄이거나 면적을 축소해 원재료 사용량 자체를 낮추는 방안도 원가절감 대안으로 거론된다. 원재료 가격 상승에 대응하는 방식이 단순한 구매단가 협상에서 소재 대체와 PCB 구조·면적 최적화를 통한 사용량 절감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소재와 PCB 구조를 변경하려면 고객사의 4M 변경 절차와 품질승인이 필요하다. 대체 소재 적용 과정에서도 기존 제품과의 성능 비교와 소재 특성 확인은 물론 고온동작·고온고습·저온동작 등 추가적인 신뢰성 검증을 거쳐야 한다. 가격이 오른다고 소재나 PCB 구조를 즉시 변경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2027년을 PCB 공급망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AI PCB는 성장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지만 범용 PCB와 FR-4는 가격 상승에 따른 설계 최적화와 대체재 적용 압력을 받을 수 있다. 특히 하류 업체의 마진이 한계에 도달하면 CEM-3에서 Metal PCB로의 전환, PCB 층수와 면적 축소, 공급업체 변경 등이 동시에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현재 가격 결정력을 확보한 원재료와 CCL 업체에도 위험요인이다. 가격을 지속적으로 인상하면 단기적으로 수익성이 좋아질 수 있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고객사가 소재 사용량 자체를 줄이거나 대체재를 채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급 부족이 만들어낸 가격 상승이 결국 수요처의 '자기잠식'을 촉진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동안 중국은 한국 전자업계가 낮은 제조원가를 확보하는 핵심 생산기지였다. 그러나 CCL 원판이 99위안에서 185위안으로 오르고 1080 PP가 13.8위안에서 41위안까지 뛰는 동안 '중국 생산=저원가'라는 공식도 흔들리고 있다.

향후 경쟁의 핵심은 원재료 가격이 몇 % 더 오를 것인지보다 누가 상승한 비용을 최종적으로 부담할 것인지에 있다. 2026년이 원재료·CCL·PCB 업체의 가격 전가가 두드러진 해라면 2027년은 ODM과 부품업체가 소재 대체와 PCB 축소, 설계변경을 통해 이에 대응하는 시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AI가 촉발한 PCB 소재 공급난이 가격 경쟁을 넘어 한국 전자업계의 소재와 설계, 공급망 구조 자체를 바꾸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다른 뉴스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