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수지 흑자에도 통화가 강해지지 않는 이유
대만달러 흐름에서 읽는 아시아 외환 구조의 변화
수출 호황과 환율의 시간차
달러는 벌었지만 시장에 나오지 않았다
한국 원화, 대만형 외환 구조로 향하고 있나

2025년 글로벌 외환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복합적인 경쟁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주요 교역국들의 환율 흐름이 단순한 시장 수급을 넘어 각국의 산업 구조와 자본 흐름을 반영하면서, 외환 정책의 투명성과 지속 가능성이 국제사회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특히 중국, 대만, 한국 등 수출 비중이 높은 아시아 경제권의 통화 움직임은 기존의 환율 공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미국 재무부가 2025년 상반기 발표한 ‘주요 교역상대국의 거시경제·환율정책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재무부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9개국을 환율 관찰 대상국으로 지정했다. 이 명단은 대미 무역흑자, 경상수지 흑자, 외환시장 개입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정된다.
보고서는 어떤 국가도 환율조작국으로 규정할 법적 요건을 모두 충족하지는 않았다고 밝히면서도, 일부 국가의 환율 정책과 외환시장 운용 방식에 대해 투명성 부족 가능성을 지적했다. 특히 높은 경상수지 흑자에도 불구하고 통화 가치가 장기간 약세를 보이는 국가들의 사례는 시장의 관심을 끌었다.
“대만달러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약했나”
2025년 외환시장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 중 하나는 대만달러의 흐름이다. 대만은 올해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 비율이 약 25%에 달하며, 주요국 가운데서도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인 환율 이론에 따르면, 이 같은 흑자는 통화 강세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실제 시장에서 대만달러는 오랜 기간 달러 대비 약세 흐름을 유지해 왔다. 달러 대비 대만달러 환율은 2022년 이후 상승 추세를 이어왔고, 이는 단기 변동성을 넘어선 구조적 약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파이낸셜타임즈 역시 이를 단순한 수급 문제로 보기 어렵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출 규모’보다 ‘외화의 이동 경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환율은 국가 전체의 무역 성과보다 외환시장에서 실제로 거래되는 통화의 흐름에 의해 결정된다.
대만의 경우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대기업들이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였지만, 이 외화가 즉시 대만달러로 환전되기보다는 해외 자산 보유, 설비 투자, 연구개발 및 해외 생산기지 확충 등에 사용돼 왔다는 점이 주목된다. 결과적으로 통계상으로는 대규모 달러 순유입국이지만, 외환시장에서는 달러 공급이 크게 늘지 않는 구조가 형성됐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집계 기준 2025년 상반기 대만의 반도체 장비 구매액은 약 160억달러 이상으로, 한국(약 150억달러)을 웃돌았다. 경상수지 흑자 규모와 달리 설비투자 국면에서 달러 수요가 선행되면서, 외환시장에 공급되는 달러가 제한되는 구조가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로 인해 대만달러는 경상수지 흑자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일 계기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 대만 산업 구조의 특성이 더해진다. 반도체 산업은 수출에 앞서 대규모 수입이 선행되는 산업이다. 첨단 장비와 핵심 소재 대부분을 해외에서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문이 빠르게 늘어나는 국면에서는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기 이전에, 설비 확장과 원재료 확보를 위한 달러 수요가 먼저 증가한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수출 호황 국면에서도 외환시장에서는 오히려 달러 수요가 우위에 서게 되고, 통화는 약세 압력을 받게 된다.
이 같은 흐름은 대만달러의 장기 약세가 정책적 의도보다는, 반도체 호황기 특유의 산업 사이클과 외화 사용 구조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대만달러는 언제 강세로 돌아설 수 있을까. 해답은 수출의 절대 규모가 아니라 수입 증가세의 변화에 있다.
반도체 신규 주문 증가 속도가 둔화되고 설비 투자 속도가 조절되면,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하던 달러 수요가 줄어든다. 이 경우 과거 사이클에서 축적된 외화가 다음 생산 단계로 흡수되지 않고, 환전이나 배당, 국내 지출로 전환될 여지가 커진다. 통화가 반응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실제로 과거에도 미국 경기 확장 국면에서는 대만달러가 약세를 보이다가, 경기 둔화 국면에 진입하기 직전 강세로 전환되는 사례가 반복돼 왔다.
이 같은 논리는 한국 원화에도 상당 부분 적용된다. 한국 역시 반도체 산업을 중심으로 외화 수익이 대기업에 집중돼 있고, 설비 투자와 해외 투자 비중이 높아 달러 수입이 즉시 환전되지 않는 구조를 갖고 있다.
다만 차이점도 분명하다. 한국은 산업 구조가 보다 다변화돼 있고 내수 비중이 크며, 개인과 기관의 해외 투자 흐름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이로 인해 원화는 대만달러보다 더 다양한 변수에 의해 움직이는 특성을 보인다.
2024년까지 한국 원화는 대만달러와 달리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지만, 이는 구조적 차이보다는 시차의 문제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관세와 연계된 대미 투자 압력이 본격화되면서, 한국 기업들 역시 중장기 해외 투자 재원을 염두에 두고 외화 환전을 늦추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될 경우, 2026년 이후 한국의 외환 구조는 대만과 유사한 양상을 띨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최근 원화와 대만달러가 동시에 달러 대비 강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반도체 수출 규모 자체는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신규 주문과 설비투자의 증가 속도가 둔화되면서 수입 증가세에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환율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던 외화 유입·유출 구조의 공통된 신호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흐름은 글로벌 달러 사이클과도 맞물린다. 달러는 미국 통화이자 글로벌 생산과 교역의 핵심 결제 수단이다. 제조업과 설비 투자가 활발할수록 달러 수요는 증가하고, 반대로 투자와 교역이 둔화될수록 달러 수요는 완화된다.
최근 시장은 미국의 금리 정책 못지않게 글로벌 제조업 사이클과 자본재 수요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환율 움직임은 단기 변동이 아니라 사이클 전환의 초기 신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환율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대만달러 사례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환율은 수출 실적이나 무역수지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산업 구조, 기업의 외화 운용 방식, 수입과 수출의 시간차가 맞물릴 때 비로소 방향성이 형성된다. 대만달러의 장기 약세는 ‘벌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벌었지만 시장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향후 원화와 글로벌 환율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