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선트 매입 확대에도 시장 냉담
40조달러 국가부채·고유가에 재정 및 인플레 우려 확산

미국 재무부가 장기 국채 금리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국채 환매 규모를 확대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장기물 금리는 정책 발표 직후의 하락분을 대부분 되돌리며 다시 상승했고, 재정적자와 국가부채에 대한 투자자들의 우려가 단기적인 시장 개입으로 해소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21일 미국의 3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이 5.25%까지 상승하면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이 장기 국채 매입 확대 방침을 내놓기 이전 수준에 거의 근접했다고 보도했다. 시장에서 이른바 ‘베선트 비드(Bessent Bid)’로 불렸던 정책 효과가 불과 하루 만에 상당 부분 사라진 셈이다.

베선트 장관은 CNBC 인터뷰에서 필요할 경우 재무부가 한 차례에 40억달러를 넘는 규모의 국채를 매입할 수 있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재정 건전화 방안도 거론하며 장기적으로 재정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실제 매입 규모가 미 국채시장 전체 규모와 비교하면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됐다. 분기 기준 추가 매입액은 약 140억달러로 추산되는 반면 미 국채시장은 약 32조달러 규모에 이른다. 더욱이 장기 국채를 사들이는 데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단기물을 추가 발행할 경우 정부의 전체 차입 부담을 근본적으로 줄이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미국의 재정 상황 역시 투자자들의 경계심을 키우고 있다.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6%를 웃돌고 있으며 약 40조달러(약 5경5432조 원)에 달하는 국가부채에 대한 이자 비용만 1조2천억달러(약 1662조96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증세에 부정적인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감안하면 재정 건전화를 위해서는 지출 삭감이 필요하지만 사회보장과 메디케어 등 주요 의무지출을 큰 폭으로 줄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여기에 행정부가 의회에 1조5천억달러 규모의 국방예산과 이란과의 전쟁에 따른 추가 비용 870억달러를 요청하고 있어 재정지출을 줄이겠다는 구상의 실현 가능성을 둘러싼 의문도 커지고 있다.
시장의 관심은 재무부의 국채 환매 확대가 시장 유동성 개선보다 장기금리의 추가 상승을 막으려는 데 목적이 있는지에도 쏠리고 있다. 베선트 장관의 발언을 두고 투자자들이 이번 조치를 시장 기능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이라기보다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장기금리 상승을 억제하기 위한 대응으로 받아들일 경우 30년물 금리가 다시 5.30%를 넘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중동 정세도 금융시장의 새로운 부담으로 부상하고 있다. 베선트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을 지원하는 국가에 경제적 대가를 물리겠다고 경고한 데 이어 이란을 상대로 ‘역대 가장 강력한 제재’를 시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구체적인 조치는 오는 월요일 기자회견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미국의 추가 제재 방침이 알려지면서 호르무즈 해협이 완전히 정상화될 수 있다는 기대도 약화됐다. 국제유가의 기준물인 브렌트유는 한때 배럴당 94.71달러까지 올라 한 달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뒤 93.80달러 안팎에서 움직였다.
시장에서는 원유 가격뿐 아니라 정유제품 공급 부족에도 주목하고 있다. 특히 경유 가격과 정제마진 상승은 운송·건설·광업·농업 등 실물경제 전반의 비용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기업 활동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경유 가격이 오르면 생산과 물류비 상승을 통해 소비자물가에도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엘니뇨에 따른 식료품 가격 상승 압력과 인공지능(AI) 투자 확대에 따른 기술장비 비용 증가까지 겹치면서 주요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도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그동안 중앙은행들은 공급 충격에 따른 일시적인 물가 상승을 통화정책으로 직접 대응하기보다 그 영향을 지켜보는 전략을 취할 수 있었지만 에너지와 식품, 기업 비용이 동시에 상승할 경우 이러한 접근법을 유지하기가 한층 어려워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재무부의 국채 매입 확대에도 장기금리가 다시 상승하면서 시장의 초점은 단기적인 채권 수급 조절보다 미국의 구조적인 재정 문제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중동발 유가 상승과 비용 인플레이션까지 겹치면서 채권시장이 요구하는 위험 프리미엄을 낮추기 위해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재정 건전화 방안이 필요하다는 평가가 힘을 얻고 있다.